Creation

천사썰 기반 로그

흰(白) 2016. 6. 30. 18:5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혀 위를 더디게 달리는 늙은 어휘들이 투명하게 요동치는 산소들 사이로 온몸을 부딪치다가 쓰러지며 자취를 감춰버린다. 파아란 공중 위에서 놀고 있는 내 몸이 자유로운 곡선을 타고 바람처럼 기운다. 내가 눈을 떴을 적의 세상은 무()에 가까운 세상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빛있어라 하매 빛이 있었다. 나도 그렇게 탄생했다. 말씀을 자궁으로 삼아 신의 입술 밖으로 숱 없는 붉은 대가리를 들어내며 그렇게 태어났다.

 

그리고는 억겁의 시간을 지냈지.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는 억겁의 시간을 보았다. 내 시간은 아직도 태초에 발을 디딘 채로 머물러 있다. 다만 사라질 우주와 앞으로 생겨날 우주들의 모든 시간을 한순간에 익힌 것뿐이다. 아담이 태어난 에덴동산의 시간도, 모세가 유대인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끌었던 시간도,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던 시간도, 예수가 이 세상의 땅을 밟던 시간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갔던 시간과 부활의 기적을 그의 제자들에게 보이던 시간도, 그 제자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복음을 전했던 시간에도 전부 내가 있었고 보았다. 난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되어있었으며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난 모든 시간 안에서 존재한다.

 

이곳은 너무 넓고 넓어서 없다고 치부하는 게 편안할 것 같은 시간 속의 어느 지점. 인간들이 땅 위로 들끓는 시간축의 하늘 위에서 무료함에 젖은 눈동자를 굴렸다.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는 검은 머리들과 먹이를 찾아 뚱뚱한 몸을 겨누는 비둘기들. 높이 뜬 몸을 천천히 내려 바닥에 발바닥을 맞춘다.